집과 사람

9/ 다락방과 임마누엘 교회 목사관

커피앤레인 2007. 12. 11. 12:51

 임마누엘 교회 목사관 외부전경

집 짓는 이야기 9

 다락방과 임마누엘 교회 목사관 .........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안 상영시장은 토목전문가답게 부산 앞바다에 인공섬을 계획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인공섬은 오래동안 논의만 무성하다가 결국은 폐기처분 되었다.

그러다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어느날 하루 아침에 현역 시장에서 죄인의 몸이 되었는데

결국은 순간적인 모멸감과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교도소 안에서 자살을 했는데 당시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정부에 미운털이 박혀서 죽었다고도 했고 어떤 사람은 무슨 여객회사로 부터 뇌물을 받은 죄로 교도소 생활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하였다.

그 이상은 내 알바가 아니지만 그가 어느날 인사차 동삼제일교회(지금은 임마누엘 교회)를 찾아왔다

 

 

원래 동삼동 산 666-1은 당시 건축허가가 제한되어 있었던 곳이었다.

왜냐하면 인공섬을 만들려고 그 곳을 토취장으로 묶어두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삼지 해변 산책길이 생길 정도로 숲이 우거지고 해안과 맞닿아 있기때문에 절경중에도 절경이었다.

다락방의 리더인 류 광수목사가 이곳으로 온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그는 키가 아주 작았다. 하지만 평소 검도를 한 탓인지 상당히 다부진 면이 있었다.

원래 소속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소속이었는데 어느 집회에서 말 한마디를 잘못하였는지 어느날 부터 이단으로 찍혀 한동안 상당히 곤욕을 치렀다.

언젠가 축구천재라는 박 주영이가 그 교단 소속교회 출신이라고하여 한바탕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는데  축구하고 종교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하고 그 후론 잠잠해졌지만 암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열정은 전세계적으로 대단했다.

당시 그 교회는 조그마한 개척교회로 출발하였는데 내가 갈때만해도 30여평의 지하에서 예배를 보고 있었다.

 

 목회실 내부 인테리어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동삼동 산 666-1로 옮겼는데

당시 부산시 영도구 동삼동 산 666-1은 한필지로 대지가 거의 3000평이 넘었다.

특이한 것은 도심에서는 좀처럼 볼 수없는 왕대가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워낙 주변이 조용하다보니 해질 무렵이면 까마귀 떼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는데 석양이 질 무렵엔

이 곳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을 정도였다.

암튼 교회를 옮기고 나자 사람들이 어디서 오는지 벌떼 같이 몰려들었다.

일요일이면 주차할 공간조차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는데 그러다보니 자연히 식당이 문제였다.

하루저녁 밥을 열 솥을 해도 밥이 모자랐다.

그러다보니 예전에 있던 식당을 좀더 확장하기로 급히 의견을 모았는데 막상 도시계획 확인원을 떼서 건축을 하려니 여러가지 걸리는게 너무 많았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식당을 확장하기보다는 차라리 이 기회에 2층으로 증축을 해서 1층은 전문 식당으로 사용하고 2층은 목사관과 비서실과 선교센타로 사용하는게 났다고 조언을 했더니 중직자회의에서도 그 안이 바람직한지 그대로 통과가 되었다.

한데 누가 책임을 지고 그 공사를 맡느냐 하는게 문제였다.

사실 해보면 알겠지만 절 공사나 교회공사는 맡아봐야 잘하면 본전이었다.

때문에 가급적이면 남의 교회 공사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다니는 교회 공사는 되도록 다들 맡길 싫어하는데 공교롭게도 설계에서 건축과 인테리어까지 제다 책임을 지고 맡으라고 어느날 아침 일찍 삼실에 출근을 했더니 류목사님이 오더를 내렸다며  사무국장이 전화로 알려주었다.

순간 기분이 묘했지만 어차피 할거라면 내가 맡는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어 수락을 했는데 당시 류목사의 말은 그 교회에서는 거의 법이라할 정도로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아직도 여러가지로 정리가 되지 않은게 많았다.

물론 어떤 계기로 인하여 그랬겠지만 이전 교회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부터는 교회라는 곳은 아주 속 다르고 겉 다르다며 이제 이후로는 다시는 지상교회는 안다닌다 하고 집에서 쉬었는데 내 제자중 한 녀석이 그 교회에 나가면서 개척교회이니 좀 도와달라고 매주일 찾아와 조르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따라나섰던게 사달이라면 사달이었다.

류목사는 만나자 마자 백만 대군을 얻은 것 같다며 사람을 상당히 깍듯이 대했는데 몇주 지나자 덜렁 대학부를 좀 맡아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원래 신학을 배운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는것도 없는데다가 인품도 안되는 주제에 뭘 나서기도 그래서 사양을 했지만 워낙 사람이 없다보니 매양 빼기도 뭣해 마지못해 맡았는데 의외로 아이들이 잘 따라주어서그런지 생각보다 대학부가 크게 부흥을 했다.

물론 류목사와 나와는 어떤 면에서 조금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교회라는 조직에 몸을 담고 있는 이상 그를 돕는건 정한 이치이었다.

때문에 바깥에서 뭐라하던지간에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사람을 살릴수만 있다면  영적운동을 일으키는건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뜻하지않게 건축까지 맡게되었으니 한편으로는  내 작품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 같아 기뻤고 또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특히 사업이라는 것이 원래 이윤을 추구하는 것인데 이윤을 추구하려니 신앙양심이 걸리고 신앙양심을 지키려니 사업이 또 엉망이었다.

해서 당시에 통용되는 건축비중 최저비용을 표준으로 계약을 했는데 사실 그건 여러모로 밑지는 일이었다.

물론 집 장사들이 하는 것처럼 하면 그 돈으로도 못만들리는 없었지만 하나의 소중한 작품으로 남길려면 그건 택도 없는 소리였다.

거기다가 주변경관이 너무 빼어나다보니 섣불리 건드렸다간 오히려 욕만 실컷 얻어먹기 딱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형태를 그리고 평면도를 만들어 설계도를 완성했더니 건축법상 창문이 문제였다.

워낙 사면이 모두 아름다운 숲속에 갇혀있어 어디를 보던지 숲이 보이게끔 설계를 했는데 몬 놈의 건축법이 한 면은 남의 땅과 인접해 있다고 창을 낼 수가 없다고 하였다.

해서 몇번이나 구청을 드나들면서 담당자를 만나 설득을 하고 이해도 구했지만 말 뜻은 알겠지만 자기로서는 도와줄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한가지 준공 이후로는 가능할지도 모른다며 넌즈시 힌트를 주었는데.......................

 

 

얼마전 Astride와 함께 그곳에 다시 갔더니 에스트리드는 너무나 한국적인 건물이라며 아름답다는 말을 연발했다.

그녀는 독일여자이어서 그런지 우리 선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암튼 준공을 마친 다음 목사관 인테리어를 하면서 목사님 취향을 물었더니 한쪽 벽면 전체를 유리로 된 책장으로 만들어 주면 고맙겠다하여 책장과 함께 집무실외에 베란다와 휴식할 공간까지 만들어 주었더니 몹씨 편리한지 매우 흡족해 했다.

어느날 다른 볼일로 목사관에 들렸더니 전에 안보던 그림 한 점이 벽에 걸려있었다.

아마 뉴욕에서 사온 모양인데 보아하니 모작 같았다.

그래서 예전에 원동에서 그린 풍경화 한 점을 선물로 주었는데 사실 그건 내가 젤 아끼는 그림이었다.

무려 6개월이나 걸려 그린 그림이었는데 막상 주고나니 만개한 벚나무 꽃들이 눈에 늘 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