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쪽 빼입고 다니능교.
5월은 여러모로 의미있는 달이었다.
하루하루가 다 감사하는 날이지만 살다보면 바쁜 날도 있었고 기억하거나 기다려지는 날도 있었는데 때로는
잊어버리고 싶은 일도 있었고 애써 만나고 싶지않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살면서 나쁜 기억보다 간직하고 싶은 아름다운 기억이 더 많은 것은 정녕코 축복이었다.
3일은 아는 여인이 수술을 했다하여 병문안을 갔다.
올만에 양복을 차려입어서 그런지 보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입을 댔다.
ㅡ오늘 장가 가나?
하든가 아니면
ㅡ샘요.이 밤에 쪽 빼입고 오데 가능교?하고 술집 여편네가 야지를 실실 넣었다.
ㅡ문둥아.병문안 간다.
ㅡ병문안 가는데 뭐하는데 구두는 그리 빤짝빤짝 합니꺼?
아무래도 수상타.
ㅡ문디 같은 년 아이가
봐라.봐라.환자야 평소에 익히 아니까 두루막을 걸치든 조끼만 입고 가든지 상관이 없지만 같은 병실에 있는 사람들은 뭔 상판때기가 왔능가?하고 힐끔힐끔 쳐다볼거 아이가.
해서 예의상 올만에 정장을 한 것 뿐인데 몬 관심이 그리도 많노?
ㅡ아따마 관심 주는 것도 행복한줄 아이소.
그나저나 환자는 여잔교?남잔교?
ㅡ여자다.와?
ㅡ그럼 그렇지
아이고.내팔자야.와 나는 옷도 내맘대로 못입노.
4일은 후배녀석 한 놈이 그림전시회 오프닝에 꼭 참석하라고 성화를 부렸다.
빛.생명 그리고 존재라는 주제로 요즘 새롭게 각광을 받고있는 디지폰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였는데 매일밤 술만 쳐먹고 다니는줄 알았는데 그동안 알게 모르게 작업을 열심히 했나보다.
BNK부산은행 그 넓은 갤러리를 꽉 다채웠다.
주경업선생과 이놈은 간도 크다하고 혀를 내둘렀지만 아직은 화단 언저리에 있는 놈이 기라성같은 부산화단의 원로화백은 물론이고 부산미술협회 이사장인 오수연씨도 초대하였다.
오프닝에 4ㅡ50명 정도의 저명인사들이 모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덕택에 가마솥에서 저녁을 함께하며 술기운이 제법 올랐나보다.내친김에 주선생이 한 잔 더하러가자고 했다.
해서,주경업선생 내외와 오늘의 주인공인 백만승작가와 클라리넷연주자인 성근아우와 함께 광복동 백광상회에 들렸더니 젊은 주모가 반색을 하며 사람을 반겼다.
그다음날은 또 조선통신사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여 년 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에 파견된 외교사절을 말했다.
조선통신사는 정사.부사.종사관의 삼사 이하.의원. 역관(통역관).악사등 총 400명에서 500명에 이르는 대 사절단으로 구성했는데 이들은 한양(현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대마도를 거쳐 에도(현 도쿄)까지 반년 이상 소요되는 긴 여정 길에 올랐다.
원래 통신이란 의미는 신뢰를 나눈다는 그런 뜻이었다.
작년엔 메르스 영향으로 축제 자체가 취소되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미찌고상과의 재회는 그 기쁨이 배나 되었다.
미찌고상은 일본 여인답지않게 키가 165cm나 되었다.
미쓰 일본에 나가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녀와 주고받은 편지만도 수십통이 가까웠는데 미찌고는 공무원이면서 히로시마 모미지렌의 최고 무희였다.
히로시마 모미지렌은 전일본 전통춤 대회에서 매년 1등을 휩쓸 정도로 실력과 전통을 겸비한 유명한 팀이었다.
미찌고상과
5여년동안 교류를 갖다보니 이젠 모미지렌팀에서도 한국에 있는 우ㅡ쌍하면 왠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올해도 그 빼어난 솜씨로 관중들을 즐겁게했는데 이놈도 그렇고 미찌고상도 그렇고 우린 느낌으로는 더할 나위없이 가까웠지만 대화는 언제나 서툰 일본어와 영어와 바디랭기지로 통했다. 물론 그녀도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고 이놈도 일본어를 열심히 했지만 막상 만나면 오갱기데스까?혼또니 우레시이데스.하고 인사를 나눈 뒤에는 대부분의 경우 눈짓이나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이제 또다시 일년을 기다려야 볼건데 ㅡ부처님이 그러셨던가?만나도 괴롭고 못만나도 괴로운게 인연이라고.
그러고보니 이번 주 토요일이 또 사월초파일인갑다.
맹숙이 년도 지금쯤 엄청 바쁘겠다.
극락왕생 할려면 이 생에서 그 정도의 공덕은 쌓아야겠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