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be with you / 1
누가 나를 건져내랴
*매 주일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성경에세이를 올리려고 한다.
낙엽을 보면서도 인생무상을 느끼듯이 하나님 말씀을 보면서
삶을 되돌아 보는 것도 우리의 삶에 또다른 양약이 되리라 믿는다.
불교에서 화두(話頭)라는 말은 의문을 가리켰다.
화두는 선(禪/고요할 선)을 수행하는데 지침과 같은 존재였다.
때문에 사제간의 문답을 따라 수행을 하면 선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여 선문답이 아주 중요하게 자리매김을 하였는데 선을 하는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위한 것이었다.
그걸 불교에서는 견성성불(見成成佛)이라 하였다.
견성성불은 깨달음을 얻은 후에 중생을 구제하라는 그런 뜻이 담긴 말이었다.
그와는 많이 다르겠지만 캐토릭에서도 자신을 돌아보는 피정(避靜)이란게 있었다.
피정은 영적생활을 위한 결단이나 갱신을 위하여 일정한 기간동안 묵상과 기도를 하면서 자기자신을 성찰하는 것을 말하였다.
피정은 일반적으로 성직자는 3년에 한번 수도자는 1년에 한번씩 했다.
피정을 하게된 이유는 종교개혁과 상당한 관계가 있었다.
일종의 반 종교개혁으로 성찰 뿐만아니라 참회의 성격도 띄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40일동안 금식하면서 기도한 것을 근거로 했다.
반면 기독교는 그와 비슷한 것이 있긴 있지만 그건 전혀 개인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불교에서 느끼는 그런 고요함이나 천주교에서 느끼는 어떤 엄숙함이
상대적으로 희박하였다.
그러다보니 교회안 사람이나 교회밖 사람들의 뇌리속에
언필칭 교회는 다른 종교에 비하여 상당히 시끄럽고 요란스러운 곳으로 각인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원래부터 고요함이나 엄숙함과 전혀 동떨어진 그런 종교는 아니었다.
다만 오늘날의 교회의 풍토나 분위기가 그러한 느낌을 강하게 심어주었을 뿐이었다.
원래 종교는 어느 종교든지 다 자기 성찰에서 비롯되었다.
기독교에서 흔히 쓰는 죄인이라는 말도 자기성찰없이는 받아들이기 아주 어려운 단어이었다.
해서 바울 같은이는 내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는데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로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고 하였고
만삭되지 못한 자라고도 고백 하였다.
그가 말년에 썼다는 로마서는 그런 성찰이 가득 담긴 메시지였는데
그는 그 곳에서 자신을 가리켜 내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고백하였다.
때문에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자기안의 또 다른 육신의 법이
죄를 행하고자 하기 때문에
오호라............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꼬 하고 탄식하였다.
하지만 그건 비단 바울만의 고민은 아니었다.
우리모두가 그와 같은 성정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이 불륜의 시대에선 바울의 이런 고민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바울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꿰뚫어보며 탄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