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되면 어머니 생각이 제일 간절했다.물론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어느 해 추석이었던가? 예수를 믿고 얼마 되지않아 이제부터는 제사를 안하겠다고 하자 어머닌 제사를 지내다말고 뭔소리 하노?하더니 내 멱살을 잡고 추석날 아침에 교회로 쳐들어간 그런 분이었다.그 날 이후로 난 단 한번도 제사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제사상에 올린 음식도 먹지않았다.그건 결혼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처갓집은 열렬한 불자였지만 명절 때만 되면 음식을 따로 차려주었다.
난 30대에 중병을 앓았는데 그때 처음으로 인생이 뭔지?생명이 뭔지?허망한게 뭔지 깨달았다.
난 어머니를 무척 사랑했지만 어머니가 못하는 것도 있다는걸 그때 처음 알았다.어머닌 당신의 생명을 버리시고라도 나를 살리려했지만 생명은 어머니 것이 아니었다.당시 이 세상에서 나를 살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돈도 권력도 명예도 심지어 애정 까지도 생명 앞에는 한갖 쓰잘데없는 바람과 같은 것이었다.
비로소 나는 하나님을 찾았고 모든걸 내려놓기 시작했다.그리고 얼마되지않아 생명의 본질을 깨달았고 내 생명의 아이덴티티를 찾았다.물론 하나님을 체험한 건 말할 것도 없고.
그 후 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었고 교회에서 대학부와 청년회를 가르치며 종교의 본질을 가르쳤다.
내 생애 암환자를 위해 기도한건 딱 두번이었다.
그중 한 분은 우리교회 장로님이었고 또 한 분은 김경선선생님이었다.
두 분 다 내겐 특별한 분이었다.
우리교회 장로님은 말기암 환자였다.말기암 환자는
대체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소한 나의 실수만 없었다면 그를 완전히 살릴 수 있었을텐데 그게 지금까지도 가슴 아팠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까지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고 찬송을 부르다 자는듯이 운명하였는데 그건 내게 큰 교훈을 줬다.
작은음악회에서 김경선선생님을 만난 것도 어쩌면 운명이었나보다.
나는 이 분의 소식을 듣고 반드시 살려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알다시피 기도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지만 그렇다고 현대 의학을 부인하지도 않았다.
각자가 해야할 일이 다를 뿐이었다.
얼마전 여러분과 함께 선생님을 만나 같이 비빔밥을 먹으며 차를 마시며 함께 웃을 때 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해서,내가 선생님께 말했다.
다시는 안 아플거라고..(누군가 재발을 걱정했지만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 나이도 이제 거의 70이 가까와 오지만 난 그 이후로 단 한번도 병원에 간 일이 없었다.
그 흔한 감기조차 하지않았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작은음악회도 내가 한 일은 결코 아니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21번째 진행하는 동안 난 늘 출연자들을 귀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누가 오든지 안오든지 단 한번도 염려는 하지 않았다.
그건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은 내가 오동동 아구 할매집 별관 한옥 설계를 하고 공사감독차 마산에 머물면서 우연찮게 성미에 간 것 뿐인데..
그때 내 심정은 가게 분위기가 너무 힘이 빠진 것 같아 이 집을 좀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전부였다.
마산에 사는 예술가들이 수십년간 즐겨찾았던 흔적들이 여기저기 붙어있었지만 현재호 선생님도 이젠 가고없고 이선관 시인도 이미 이 땅의 사람이 아니었다.
해서,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한건데
그 생각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전혀 변함이 없었다.
이제 작은음악회 2주념 기념 야외공연 프로그램도 다 완성되었고 김경선선생님도 시월 야외음악회에 출연하실 만큼 건강이 회복되었으니 이보다 더 기쁜 한가위가
또 어디 있을까?
하여, 휘영청 둥근 보름달이
오늘따라 더 밝고 아름다운건 나혼자만의 기쁨은 아니니라.
선생님.오래오래 사시고 큰 일 많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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