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사람

10/ 인천 카리스 호텔 히메지성

커피앤레인 2007. 12. 12. 11:24

 인천 카리스 호텔 히메지성 내부

 

 

인천 카리스 호텔 히메지 성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일본내의 파벌 싸움은 읽을수록 흥미진진했다.

강자가 죽으면 새로운 강자가 일어났고 그가 죽으면 또 다른 강자가 일어났다.

개중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특이했다.

풀잎 위의 이슬도 무거워지면 떨어지게 마련이다한 그의 말에서 느끼듯이 그는 인내의 화신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위기 때 마다 여자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유명했다.

암튼 그는 천하를 통일했고 오늘의 도교(東京)를 수도로 만든 장 본인이었다.

당시는 교또(京都)가 권력의 중심지였다.

교또엔 당대의 최고 실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살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2년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의 습격을 받고 큰 상처를 입고 자결을 하자 그 뒤를 이은 인물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가장 유능한 무장이었다.

그는 주군인 노부나가가 죽자 신속히 배신한 무장들을 제압하고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을 설욕한뒤 그 뒤를 이어 일본 최대의 실력자로 등극하였다.

그에 비해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동쪽에 근거지를 잡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여러차례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별 성과가 없자 힘이 딸리는 것을 알고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였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히메지성은 이런 역사적인 인물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성이었다.

 

일본 효교현 히메지시 혼마치에 있는 히메지성은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아름답고 유명한 성이지만  일본의 3대 성엔 들지 않았다.

일본의 3대 성은  나고야 성/오사카 성/구마모드 성/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히메지성을 젤 좋아했다. 

히메지(姬路) 성을 다른 말로는 시라사기(白鷺)성 이라고도 불렀다.

이는 성이 새하얗기 때문이었다.

성이 새하얀 이유는 천수각이 목재로 지어져 있기 때문에 화재를 대비해 흰 회를 발랐기 때문이었다.

암튼 일본 천하를 손에 쥔 도꾸가와 이예야스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일본역사가 무척 잼있다는 것을 알게 될거다.

물론 우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하여는 별로 좋은 감정이 아니지만 대망이라는 일본 드라마를 보면 마치 마지막 사무라이를 보는 것 보다 더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원래 나는 일본 디자인을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단골로 오가는 할부 책장사들이 일본 책이 새로 나왔다고 번번이 가져왔지만 일본디자인은 한 두번 보고나면 더 볼게 없었다.

해서 가급적이면 일본책은 별로 사지 않았다.

대신 스칸디나비나나 이태리 쪽 디자인 책을 부지런히 더 사 모았는데 생각지도 않게 호텔공사가 들어오면서 서울에 간김에 일본에 관한 책을 가능하면 많이 사왔다.

디자인을 하려면 적어도 일본의 역사와 정서를 어느정도는 이해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해서 한동안 삼실에 쳐박혀 그들의 전통과  건축양식과 실내구조는 어떠한지 하고 한동안 밤을 새우다 시피해서 연구를 하였더니 그나마 조금씩 윤곽이 잡히는듯했다.

일본은 무덥고 습기가 많아 대체로 목재를 많이 사용하였다.

특히 왕골이나 짚을 이용하여 다다미 방을 만들었는데 그건 그들의 기후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렇지만 대개 일본 디자인은 중국처럼 화려하거나 기교를 많이 부리기 보다는 간결하면서 절제미가 넘쳤다.

더우기 오래동안 영주들 중심으로 권력을 유지하다보니 칼을 찬 사무라이들을 많이 길러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일본의 차문화는 상당히 유별났다.

그들은 우리처럼 차를 멋으로 먹거나 숭늉처럼 다반사로 먹은게 아니라 거의 도의 경지에 이를 만큼 퍽 진지했다.

반면 정원은 우리와 달리

산을 앞에 두고 집을 지어 조망하는 스탈이 아니라 그걸 통째로 옮겨다 놓은 것 처럼

간결하면서도 오밀조밀하게 만들어 집안에서 즐기도록 했다.

때문에 우리의 전통 정원은 마치 추임새 처럼 뭔가 흥취가 느껴졌지만 저들의 정원은 깔금하면서도 단아한 느낌을 주었다.

해서 그런지 이 어령교수는 그들을 축소지향적인 민족이라고 일컬었다.

아무튼 그들은 모든 걸 집안에 들여 놓고 감상하는 걸 유난히 좋아했다.

그러다보니 작으면서 오목조목한걸 좋아했다.

일본식 정원은 사무라이 문화와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당시 사무라이의 평균 수명이 28세 밖에 되지 않았다니 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날들을 보내며 늘 마음의 평정을 찾았던 것 같았다.  

때문에 차와 일본식 정원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깔고 있었던게 아닌가하고 느껴졌다.

 

 

아무튼 히메지성은 일본에서는 제일 아름다운 성으로 유명한데

산요 히메지역에서는 15분이면 닿았다.

매년 벚꽃이 피면 그 일대는 사람들로 장관을 이루었는데 카리스호텔 백사장은 40대 중반의 몸매가 갸름한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일본식 고급 레스토랑을 호텔 내에 꾸미고 싶어했다.

하지만 마땅한 스토리를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요즘은 디자인도 단순한 볼거리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러브 스토리와 같은 어떤 이미지나 이야기가 필요했다.

해서 이 넘을 불렀는 모양인데 호텔은 4성급이었지만 외관은 생각보다 덜 화려했다.

1차 미팅을 마친후 일박을 그 호텔에서 하고는 디자인 컨샙이 결정되는대로 다시 만나기로했다.

하지만 서울로 돌아와서도 좀처럼 머리에 디자인이 떠 오르지 않았다.

해서 설에 온 김에 코엑스에나 함들려보자하고 전철을 타려고 서울역 지하도를 내려갔더니 순간  어디서 많이 본듯한 일본 성이 눈에 확 들어왔다.

보아하니 일본으로 관광을 오라고 붙인 광고판이었다.

순간 이거다하고 디자인 컨샙을 성(城)에다 맞추자하고 스케취를 했더니 백사장이 아주 좋아라했다.

한데 문제는 공사비가 문제였다.

디자인을 따라  제대로 공사를 하려면 적어도 8억원은 느끈히 들 것 같았다.

하지만 호텔측 예산은 거기에 반도 못미쳤다. 

 

 

협의끝에 일단 기본 컨샙은 살리되 약 3분의 1값으로 할 수있는 디자인으로 바꾸기로 하고

공사는 그쪽에서 맡되 공사감독만 이쪽에서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철거를 먼저 시작한 관계로 디자인은 시간관계상 호텔방에서 하기로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의 작품이 조금씩 조금씩 윤곽이 드러나자 디테일한 부분은 아무래도 내가 쓰던 일꾼들을 데리고 와야했다.

 매일같이 눈만 뜨면 노가다와 부대끼며 살다보니  어느듯 호텔에서 잔지도 63일이 후딱 지나갔다.

내 생애 이렇게 호텔에서 많이 자본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나중엔 집이 그리웠다.

공사가 거의 마무리가 되자 객실을 오가며 서빙을 하는 아줌마들과 너무 친해졌는지 헤어질땐 뭔가모르게 가슴이 아렸다.

해서 마지막 날은 계산동 논고동집에 가서 삼겹살에 소주를 한잔씩 나누며 회포를 풀었는데 지금도 그 정은 여전해 인천에만 가면 반드시 그곳에 들렸다 오곤 했다. 

암튼 거의 3개월여에 걸친 공사를 마무리 하였더니 그나마 수고한 보람이 있었던지 꽤나 손님이 몰려 때론 만방(호텔 방이 꽉 차는것)하는 것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렸다고 하였다.

사실 카리스호텔 히메지성은 그냥 고급 일본식 레스토랑에 불과했다.

하지만 디자인만은 많은 정성을 기울렸는데  좌우 객실을 중심으로 중앙에는 작은 분수대와 다다미 방을 두었고 장방향으로 길게 뻗은 좌우베란다는 일본식 정원으로 꾸몄다.

객실은 모두 각각 디자인을 달리해서 변화를 주었고 출입문은 이중문으로 여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일본식 마루를 통해 방으로 들어가게 했다.

문은 모두 일본식 전통 문살 미닫이 문으로 만들었는데 목재는  벚나무(싸쿠라)로 통일했다.

각방 화장실도 미닫이 문을 만들었는데 원래 이네들은 검은색과 붉은 색을 좋아해서 복도 바닥은 예산상 검은 대리석 대신 폴리싱 타일로 특별히 처리했고 에리베이트에서 내리면 일본 특유의  빨간 원형 박공지붕을 볼수 있게 배려해 한눈에 봐도 일본풍을 느끼게끔 했다.

물론 입구엔 조용히 물이 흐르도록 분수를 두었는데 원래 원형 박공지붕은 일본만의 특이한 지붕형태로 자리매김 하였지만 사실 원조는 중국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더이상 이런 원형 박공 지붕을 짓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