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공이산(愚公移山)의 심정으로 ........
끈질길 정도로 시골은 자연으로 그 생명력을 유지한 반면
도시는 끊임없는 변화로 그 생명력을 대신했다.
때문에 도시는 언제나 분주했고 디자이너들은 어느 장르를 불문하고 늘 새로운 디자인에 시달려야했다.
해서 변하지 않는 것은 이미 그 가치를 상실했고 진부함은 사람을 때때로 역겹게 했다.
그만큼 도시는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했고 건축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재질이 변했고 형태가 변했고 공법이 변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도시에 문화를 입힌 특이한 케이스였다.
뉴욕 센트럴 파크 북쪽 89번 대로에 위치한 나선형 모양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설계한 작품이었다.
마치 사과껍집을 깍듯이 그렇게 동선이 끝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라이트 역시 처음부터 그런 설계를 하진 않았다.
대부분 수평과 수직으로 만나는 그의 작품은 캘리포니아 낙수장에 이르면 거의 절정에 이르렀다.
반면 스페인 북부 바스크 해안지대에 위치한 인구 40만명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위치한 빌바오는 이미 별볼일 없는 철강도시였다
광산은 문을 닫고 도시는 이미 힘을 잃은지 오래였다.
낡고 음침한 이 도시에 다시 생명을 불어 넣은건 프랑크 게리(Frank Gehry)였다.
그는 마치 철강 뭉치 몇개를 조합한듯한 미술관을 선보이며
빌바오를 일약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었다.
그게 디자인의 힘이었다.
언젠가 한국에도 왔는데 나는 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설계자인 프랑크 게리(Frank R Gehry)를 주목했다.
또 한 사람 내가 주목하는 사람은 안다 다다오(安藤忠雄)이었다.
나는 자주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
1988년에 지은 오사카의 갤러리아 아카와/Gelleria Akka와 1989년에 지은
빛의 교회는 그의 건축세계를 한 눈에 가늠해 볼 수있는 참 좋은 작품이었다.
물론
세 사람 다 기존의 건축 질서와는 전혀 다른 파격적인 디자인을 선 보였다.
때문에 그들의 존재는 다른사람 보다 훨씬 더 독보적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해서 건축은 늘 변해야하고 디자인 또한 변해야 이 바닥에선 그나마 자기 작품을 선 보일 수 있는 명맥을 유지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그 곳을 찾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들이 불편하면 그건 또 다른 의미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해서 우린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또 하나의 작품
켈리포니아의 낙수장을 보면서 의외로 많은 의문을 던졌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폭포수 바로 위에 세운 이 건물은
수평과 수직선을 극대화 한 작품으로
이미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는 걸작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곳에 사는 사람의 불평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것이었다.
하긴, 하루 이틀도 아니고 365일 매일밤 똑 같이
큰 폭포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왠만한 사람에겐 여간 고통스럽고
성가신 일이 아닐게다.
해서,
우리는 또 다른 화두를 던졌다.
아무리 세계적인 작품이라 해도 다 좋은것은 아니다는
선문답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네 정서와 비슷한 걸 더 선호했고
우리네 심성과 다른 것은 다소
이질감을 느껴 배타하였다.
그건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일본은 일본대로 중국은 중국대로 우리와 전혀 다른 고유의 선이 있었고 색갈이 있었고 정서가 존재했다.
희미한 내 기억으로는
집이란 개념이 처음으로 내 머리 속에 입력된 것은 유년시절이었던 것 같다.
6.25 동란 직전이었으니까 내 나이 아무리 많아봐야 네댓살에 불과했다.
그 때 내가 살았던 집은 유리창이 엄청 많은 일본식 스타일의 우체국 관사였다.
당시 내 아버님은 우체국장 서리를 맡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 역시 그 곳에서 나고 그 곳에서 자랐는데 이 관사가 바로 나의 최초의 집이었다
.
그 후 아버님은 6.25 동란이 발발하자 포항에서 부산으로 전근을 하셨는데
그 땐 피난민들이 너도 나도 물밀듯이 부산으로, 부산으로 몰려왔기 때문에
여간해서 반듯한 집을 구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부산에서 오래동안 터를 잡은 친인척들의 도움으로
우리 가족은 아미동 산꼴짜기에 집을 하나 샀는데 그 집은 당시나 지금이나 모양새는 별로였지만 대지만은 엄청 넓었다.
거의 200여평 가까이 되었는데 그 집엔 텃밭겸 마당도 있었다.
물론 대청마루도 있었다.
난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재미삼아 콩도 심고 옥수수도 심고 고구마도 심었다.
하나 예나 지금이나 이재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보니 수확보다는 식물이 어떻게 자라는지 그게 더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당시 내가 살았던 집은 흙담으로 경계를 표시했다.
때문에 흙담 주위엔 언제나 꽃이 만발했다.
그중에서도 국화 꽃이 만발했다.
국화꽃은 내 어머님이 특히 좋아하는 꽃이었다.
당시 아버님은 여전히 우체국에 다니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한 연식 야구협회 이사로서 야구 심판도 겸하셨다.
원래 내 아버님은 국가 대표급 수준의 명포수 출신이었다 . 그래서 그런지 아버님 사진은 자연히 야구에 관한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아버님이 야구선수로서 활동했던 시기는 불행히도 일본 강점기 시대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일본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은 우승기를 앞세우고 찍은 그런 사진들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망자(亡者)의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불에 태워야 한다며 기념사진 한장 남겨 놓지 않고
태워 버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아쉽고도 애석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님은 매년 봄이되면 거의 매일이다시피 구덕야구장으로 갔다.
그때만 해도 고교야구가 엄청 인기를 얻을 때 였는데 아버님은 주로 주심을 많이맡았다.
해서 종종 투수가 뿌린 공에 몸을 맞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 날은 숨을 제대로 못쉬겠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내 아버님 체구는 어린 내가봐도 그리 크진 않았지만 운동장에서 스트라이크................볼 , 하는 목소리만큼은 멀리서도 다 들릴만큼 상당히 쩌렁쩌렁했다.
그런 영향때문인지 나 역시 초등학교 시절엔 얼마간 야구 선수를 했다.
하지만 난 체질적으로 야구선수를 할 그런 신체조건은 아니었다.
아버님은 당시 자주 박 영길 전 롯데감독(당시 박감독은 경남고등학교 4번타자였을게다)을 대단한 선수라고 칭찬하였다.
내가 기억하는 내 아버님은 키는 작았지만 마음이 무척 따뜻하고 욕심이 거의 없는 그런 분이었다.
때문에 나와 내 바로 아랫 동생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도방이라는 꼼보 구두를 맞춰신고 다녔다. 뿐만아니라 아버님은 내가 등교할 때 마다 꼭꼭 용돈을 손에 쥐어 주었다.
해서 난 지금까지도 돈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처럼 돈에 대한 개념이 참 희박했다.
내 아버님이 야구 외에 유일하게 즐기는 것은 술을 마시는 일이었다.
때문에 우리 집은 자주 야구와 관계된 분들이 드나들며 술을 마셨는데 하지만 좀처럼 집에서 술을 과음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경우는 직장에 다녀오면서 한잔 하거나 아니면 야구 심판을 하고 난 뒤 그 자리에서 심판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는데 그날 만은 대체로 좀 거나하게 취했다.
술이 취하면 아버지는 산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오다 중간에서 간혹 주무시기도 했다.
그런 날은 영낙없이 나와 나의 어머니가 마중을 나갔다. 하지만 난 단 한번도 아버님이 술주정을 하거나 주사를 늘어 놓는건 보질 못했다.
언제나 말없이 조용히 혼자 방에 들어가 주무시거나
아니면 아이들 재롱이 보고싶다며 억지로 우리를 깨우곤 혼자 껄껄 웃으시다
그렇게 주무셨다.
어느 봄날 아버지와 나는 서울로 갔다.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아버님은 동래에 큰 아버지 되시는 분이 계신다고 ................말씀 하셨다.
당시 나는 너무 어렸고 철도 없었기 때문에 그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와 얼마나 가까운 친인척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물론 나중에사 안 사실이었지만 그 분이 바로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리나라 최초의 육종학 권위자인 우 장춘 박사였다.
하지만 나는 우리 집안 내력이나 족보에 대하여 아는게 별로 없었다.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얼마전에 20년 근속 대통령 표창과 훈장을 받으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잘 알지 못한 것 같았다.
암튼 아버님이 심장마비로 쓰러지던 날 난 처음으로 내 발로 교회를 갔다.
내 기억으론 그날이 수요일이었는데 아버님은 이미 기력이 다한 상태였다.
난 아버님 머리 맡에 앉아 있다가 아버지, 오늘 나 교회 다녀올게요.하고 인사를 했는데 그것이 나와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갑작스레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상당히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 후 우리 4 남매를 키우는 일은 모두 어머니에게 넘겨졌는데 내 위로는 누나 한분이 있었고 내 아래로는 동생 두명이 있었다.
누나는 선생이 꿈이었는지 당시 사범학교를 다녔는데 머리가 워낙 뛰어나다보니 졸업할 때 까지 단 한번도 1/2등을 남에게 내어주질 않았다.
이제 누나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처럼 아버지를 대신했다.
하지만 누나는 우리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다.
교사가 되고 난 뒤 몇년이 못되어 갑작스레 시집을 가버리는 바람에 우리는 엄청 충격을 받았고 자존심도 많이 상했다.
어머니의 구상도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는데 나는 그런 누나를 오래동안 용서하지 못했다.
나의 어머니는 원래 경북 영일군 대송면 공수동의 중농의 딸이었다.
할아버지 집은 윗채와 아래채. 그리고 마당 한쪽에 디딜방아가 있었고 헛간이 있었다.
내 기억으론 마당이 너무 넓어 울안에 큰 채소 밭과 대나무 밭이 있었고 다른 한쪽은 매롱나무를 비롯하여 온갖 꽃나무들이 큰 화단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할아버지 집은 감나무가 엄청 많았다.
해서 그런지 난 아직도 감나무를 무척 좋아 하였다. 하지만 장가를 가니 처갓집은 감나무 밭이 아니라 아예 감나무 과수원을 하고 있었다.
난 여전히 농사가 뭔지? 시골서 땔감은 어디서 구하는지 ..............그것 조차 당시는 알지못했다. 간혹 방학을 이용하여 할아버지 댁에 가면 화장실(당시는 정랑이라고 했다) 가는 것과 밥 먹는 것이 그리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는데 당시는 종이가 워낙 귀하다보니 간혹 종이가 떨어지면 사촌 누나는 변소 갈 때마다 박잎을 따 주거나 그것도 없으면 보드라운 볏짚을 모아서 어떻게 해 주었는데 그게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건 아침 저녁으로 먹어야 하는 꽁보리밥 이었다.
해서 난 언제나 할아버지 밥상에 붙어서 밥을 먹었는데 다른 사람은
다 꽁 보리밥을 먹었지만 할아버지 만큼은 항상 쌀밥을 살짝 얹어 주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내가 통 밥을 못 먹자 항상 쌀밥 얼마간을 덜어서 내게 주셨다.
당시는 보릿고개란 것이 있었기 때문에 다들 꽁 보리 밥이나 나물 밥이나
옥수수 밥 또는 감자 밥 내지는 고구마 밥을 해 먹었는데 양식이 턱없이 귀할 때이다보니 씨래기 죽이라도 안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하던 그런 때였다.
하지만 난 단 한번도 그런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밥 보다는 칼국수를 더 좋아했다.
해서 아침부터 칼국수를 해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난 여전히 입이 짧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아버님의 퇴직금 중 일부를
우리 형제들 학자금 명목으로 친인척 동생에게 맡기었다.
어머니 생각은 금융계통에 밝은 동생에게 맡기면 그나마 원금을 잘 관리해주리라 하고 굳게 믿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머니 생각하고는 달리 어머니 동생은 이자는 고사하고 원금마저 다 날려버렸다. 어머니는 무척 상심해 하셨지만 바로 아래 동생이 한 짓이다 보니 어머니는 그 일을 더 이상 입밖으로 꺼내어 거론하지 않았다.
그나마 아직 아버님 퇴직금 중 절반정도는 당신의 수중에 남아 있으니까 그것이라도 잘 융통하면 아이들 공부는 안시키겠나 ..............................하고 생각했나 본데 그래서 궁리를 한게 계를 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계가 무척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얼마간 돈이 붙자 어머니는 계하는 일에 점점 더 재미를 붙였다. 판 돈이 커지면서 나중엔 계주에게 모든 돈을 위임했는데 어느 날 그 돈마저 계주에게 홀라당 다 떼이자 마침내 자리보전하고 누우셨다. 난 당시 공부를 한답시고 시골에 묻혀 있었는데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겼으니 빨리 돌아오라고........................전보 한장이 난데없이 날라왔다.
하여, 서둘러 모든 걸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은 마치 절간처럼 조용했다.
해서 엄마, 왜? 무슨 일인데......................................? 하고 묻기가 무섭게
먹보 그 년이 돈을 다 떼먹고 야반 도주를 했다며 이 일을 우짜믄 좋노?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먹보 아줌마는 몇해전에 우리 이웃 집에 이사온 계주 아줌마이었다.
귀가 좀 어두워서 다들 그 여자를 먹보라고 불렀는데 이 먹보 아줌마가 무슨 낌새를 챘는지 사흘이 멀다하고 우리집을 들락날락 하며 언니, 언니 했다.
어느 때는 .언니, 이것 좀 먹어봐요 .하고 먹을 것도 사오고 어머니 대신 시장도 봐주자 처음엔 사람이 너무 친절하다며 수상하게 여기던 어머니도 어느새 경계를 늦추었는지 돈이라는 돈은 모조리그 계주라는 먹보 여자에게 맡겼는데 어느날 아무도 모르게 야반 도주를 하는 바람에 졸지에 알거지가 된 울 어머니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정신마저 오락가락 했다..
해서, 엄마!.................돈은 또 벌면 되니까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어쩌겠어요 . 몸이라도 추스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진짜 큰일나요.... 하고 달래었지만 나 역시 앞길이 캄캄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난 결론이 나기까진 매우 진지했지만 일단 결론이 나면 결단도 빠르고 단념도 빨랐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니 앞길을 망쳐서 우야노 하고 여전히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사실 나는 막역하나마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아침 저녁으로 영어만 공부했는데 그런 덕분인지 지금도 영어는 조금 이해했다. 하지만 남에게 내어놓을 정도로 유창한 그런 실력은 또 아니었다.
하지만 얻는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나는 거의 매일 같이 미문화원에 출근을 했다. 그곳에서 아침부터 저녁 까지 거의 점심도 거른 채 영어 공부를 계속 했는데 어느 순간 부터 그것이 스트레쓰가 되었던지 머리카락이 하나 둘 빠지기 시작했다.
그 차중에 급성간염에 황달까지 겹치자 내 인생은 그야말로 완전 내리막 길이었다.
마침내 죽음이 경각에 이르자 모든게 허망하고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물밀듯이 용솟음쳤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체험했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는데 돌이켜보면 그 때가 내인생의 터닝포인트 였던게 분명했다.
난 당시 교회도 다녔지만 술도 엄청 많이 마셨다.
그때 만난 분 중에 내가 잘 아는 시인 임수생 선생과 박 재호 선생,보이스카우트 연맹의 박 기찬선생,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된 김 상겸 목사였다. 당시 그는 병원에 근무했는데............신학은 그 후에 했다.
임 수생 선생은 너무 오래동안 나를 보지 못한 탓인지 당시의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이스카우트 연맹 부산총재이신 박 기찬선생은 나를 잘도 기억했다.
그즈음 난 또 한 친구와 깊이 사귀었는데 부산일보 문화부장을 지낸 학종이 형이었다.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와 나는 서로 호형호제하며 서로를 상당히 배려했다. 그는 평소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다고 말했는데 사실 부산일보에서 수습기자를 모집한다고 제일 먼저 알려준 사람도 나였고 일단 부산일보에라도 들어가라고 등 떠민 사람도 나였다.
하지만 저녁이 되면 우린 거의 매일 같이 백조다방에 죽치고 앉아있었다.
당시 백조다방은 시청 앞 지하실에 있었다. 오아시스 다방이 사라진 후 백조 다방은 클래식 매니아들로 거의 빈자리가 없을만큼 언제나 북적거렸다.
때문에 이 바닥에서 내노라 하고 놀았던 인간치고 오아시스 /백조/애천 커피숍을 모르면 절마 저거 부산 문화의 본류조차도 모르는 놈 아이가 하고 상당히 업수임을 당했다. 당시 백조 다방 여주인은 엄 영주씨였다.
그녀는 후에 백조 다방을 그만두고 광복동 비너스 2층 (당시는 남영 나이론이었다)에 새로운 음악 다방을 열었는데 그게 애천다방이었다.
엄 영주씨는 어느 날 장미 화가로 유명한 성 백주 화백과 함께 불쑥 내 사무실을 찾아왔는데 내용인즉 새로운 세미 클래식 다방을 열고 싶다며 우선생님이 디자인을 좀 해달라며 부탁을 했다.
난 최소한 20일 이상은 디자인 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엄여사는 디자인이 뭔가를 조금은 아는 사람같았다.
디자인 할 시간은 충분히 드릴테니 반드시 좋은 작품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다.
난 주어진 20일 다 채우며 디자인을 했는데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게 복 이층 커피숍을 선보인 작품이었다. 이건 부산 최대의 번화가인 광복동에 처음으로 내 이름을 걸고 선보인 작품이기도 한데 문을 열자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는지 자리가 비좁을 지경이었다.
당시 그 곳을 즐겨 찾으신 분들 중에는 사진작가인 허종배 선생과 최민식 선생도 있었다.
백조다방엔 당시만 해도 인기 DJ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군계일학이라고 미모의 여성 DJ가 있었는데 누구나 한번쯤은 말을 걸어 보고 싶은 그런 여인이었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그 여인 하고는 별 인연이 없었다.
하지만 학종이 형은 같은 교우라 그런지 상당히 친한사이였다.
해서 우리 셋은 틈만 나면 광복동 남포동을 싸돌아다니며 젊음을 불태우곤 했었는데 ......................(내가 결혼을 하겠다고 하나님께 기도한 사람은 이 여인이 처음이었다 )
하지만 나의 운명은 내가 원했던지 원치 않았던지 나의 염원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또 걸어갔다
해서 만난 사람이 지금의 아내인데 나의 아내를 만난건 정말 우연의 일치였다.
처음엔 같은 곳에서 서로 목례만 하고 지나치는 그런 사이였다. 한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다 아는 어느 여인의 결혼식장에 갔다가 우린 다시 급속도록 가까워졌는데 그 이후로 우린 거의 2여년 동안을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연극도 보고 그리고 거리를 배회했다.해서 지금도 간혹 시내에 나오면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한 코스를 답습했다.
달라진게 있다면 단골식당이 바뀐 것과 연극 대신 영화를 즐겨 보는 정도였다.
내가 건축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도 거의 그 무렵이었다.
처음엔 디자인만 하려고 하였는데 이상하리만치 현장에서 자꾸 트러블이 생기면서 도대체 무슨 일인가?...............하고 현장엘 갔더니 주인은 주인대로 화가 나 있었고 일꾼들은 일꾼들대로 도무지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볼멘 소리를했다.
내용인즉 주인은 주인대로 난 당신만 믿고 디자인을 맡겼는데 당신은 얼씬도 아니하고 일꾼들은 걸핏하면 나는 그렇게 못하요. 하고 나자빠져 버리니 도대체 내가 누굴 상대해야합니까 하고 흥분을 했다.
반면 일꾼들은 일꾼들더러 쥐뿔도 모르면서 주인이랍시고 하루종일 옆에 서서 콩놔라 팥놔라 하니 이거 신경질 나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죠 하고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주인은 주인대로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가 죽느냐, 사느냐 하고
샾을 꾸미는데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고 애만 타다보니
화가 나는건 불을 보듯 뻔한 이치인데 반면 일꾼들은 일꾼들대로
그렇찮아도 까다로운 일이다 보니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데
계속해서 옆에서 콩놔라 팥놔라 하니 신경질이 날만도한데 그보다 더 큰 걱정은 공사가 하루 지연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 노임을 지불 해야하니 아무리 마음씨 좋은 착한 일꾼이라도 그건 무리였다.
해서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책상머리에 앉아서 탱자탱자하게 놀았던 내 잘못이오 ...하고 그 날 부터
직접 현장으로 출근해 이건 이거다 저건 저거다 하고
간단명료하게 지시를 내리니 주인은 주인대로 그 마음이 곧 내 마음이다 하면서 좋아라 했고 일꾼들은 일꾼들대로 애매한 것이 없어지고 작업 진행 속도가
엄청 빠르게 진행되다보니 나중엔 노임도 많이 절약되고
똑 같은 일을 계속해서 붙였다 뜯었다하지 않으니 스트레쓰도 훨씬 덜 받으니
너무 좋다며 현장 분위기가 몰라보게 화기애애했다.
하여 그날 이후로 오늘날 까지 내가 직접 디자인한 공사는 반드시
현장에 나가 내가 직접 진두지휘했는데 인테리어를 했던지 집을 지었던지 무엇을 했던지간에 한번도 우리 집을 와 이 꼬라지로 만들었오?하고 불평하는 소리는 듣지 않았다.
때문에 공사가 완전히 완료되고 나면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우리 집을 이렇게까지 지어줄줄은 몰랐다며 공사 잔금 외에도 별도의 보너스를 봉투에 넣어 고마움을 표시했는데 IMF 이후 세상이 많이 바뀌었는지 아니면 마음의 여우가 예전만 못하는지 그런 정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서 유석이가 그랬던가.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 있나요 흘러가는 시냇물을 막을 수가 있나요
아가들이 자라나서 어른이 되듯이............................슬픔과 행복속에 우리도 변했구려 했듯이
노가다와 한 솥밥을 먹은지 벌써 30년이나 지나고보니
그 사이 아이들도 어느새 훌쩍 커버렸는지 대학을 졸업하고 제각끔 제 길을 찾아갔는데 ....그나마 감사한 것은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아이들을 예의 바르게 반듯하게 키워준 것만으로도 아내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존경을 표한다.
이제 큰 아이도 지 애비 직업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았겠지만
사실 나도 아버지처럼 건축을 하겠습니다 하고 홍대 건축과를 지망했을땐
난 참 황당하고 난감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 나름대로 미적인 감각이 있는지 자체 공모전에서
2등으로 당선되었다며 무척 좋아라 해서 그가 만든 모형을 한번 가져와봐라 했더니 적어도 건축선을 보는 안목만은 그런대로 있는 것 같아
더 이상 걱정을 안했는데
반대로 둘째아이는 내가 보기에 성격이나 머리를 볼 땐
서울대학교 농대를 갔으면 딱 안성마춤이었지만
지 애비가 한순간에 결혼이라는 운명을 스스로 거스렸듯이
내 아이도 제운명을 스스로 거스르고 싶었던 것일까?
고 2 학년 때였던가,
호텔리아라인가 하는 드라마를 보더니 뜬금없이 나도 호텔리아가 되겠습니다 하더니 결국 세종대학교 호텔경영학과로 들어갔는데.........................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고 했던가?)
암튼 지금은 학부를 끝내고 호주에 가있지만 지애비 말대로 서울대학교 농대를 갔더라면 우리 일가이신 우 장춘 박사의 대를 이을 또 한사람의 우수한 인재가 태어날법도 한데 지 인생 지가 살고 싶은대로 산다는데 애비인들 우찌 막으랴.
원래,우리 우(禹)씨 집안은 고려조로 부터 시작하였다.
고려땐 그나마 상당한 세도를 누렸는지 한때는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삼정승을 모두 우리 우씨 집안이었다는데
어느 때였던가
새로 왕위에 오른 왕이 선왕의 첩을 건드리자
이는 인륜에도 어긋나고 천륜에도 어긋난다하여
임금님이 계시는 편전에 거적더기 속에 도끼를 감추고 들어가
왕의 행위가 옳지 못하나이다...................하고 고언을 한 후
감히 신하가 왕을 욕보였으니 이 도끼로
불충한 신하를 죽이소서 하고 머리를 읊조렸다는데
우리 집안도 어찌보면 꽤나 강단이 있는 집안임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나도 노가다와 더부러 찌지고 뽁고 해사면서 잘 사나보다)
그러나 우리 근세사로 오면서 세상이 너무 하수상하다보니
민비시해사건에 연루된 우 범선 같은 울 할애비 같은 이도 있었고
의령 총기 사건으로 꽤나 유명했던 우 순경도 있었다.
하여 어느날,
뜻하지 않은 디자인 하나를 의뢰 받았는데 그게 바로 의령군 궁유면 관할의 궁유미술관이었다.
누군가 폐교를 인수받아 미술관으로 운영을 하다 힘이 부쳤던지 도에서 예산지원을 받아 면에서 운영한다며 갤러리 일부를 개조하고 싶다고 디자인 의뢰를 했는데 궁유면은 이미 우리 일가의 허물도 있고 해서 얼마간 속죄하는 심정으로 디자인만 보내주고 공사는 내 사무실에서 오래동안 일했던 아가씨가 맡았는데 일이 잘 되었는지 어땠는지는 ,,,,,,,,,,,,,그 후로 갈 일이 전혀 없다보니 궁금증만 더할 뿐이었다.
암튼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다.
언젠가 오발탄/카인의 후예/ 김약국의 딸들/잉여인간/막차로 온 손님들/순교자를 감독한 유 현목 영화감독님이
/우 사장, 언제 제주도로 한번 넘어와
거기에 내 땅이 약간 있는데 말이야 그곳에 조그마한 집이 한채있어
그것,언제 한번 손 봐줘......................했다.
유 현목 감독님은 우리나라 영화계 인사라면 누구나 다 아는 영화계의 권위이고 마에스타이셨는데 그분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분 중에 한분이신 김 사겸 영화감독님의 사부이기도 했다.
해서 부산 국제영화제에 오시면 한두번 유감독님을 대접했는데
유감독님은 그걸 오래동안 잊지 못하셨나보다.
김감독님 편으로 늘 고맙다 했는데 그날도 영화제 관계 일로 부산에 내려오셨다가 강나루에서 함께 술을 마셨는데 몬 말끝에 건축이야기로 이어지자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언제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제주도로 건너오라고 전화만 하시면 열일을 제쳐두고서라도 가겠습니다 .
하고 철석같이 약속을 했는데 아쉽게도 감독님이 그 후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우리의 약속은 한갓 꿈으로만 허공을 맴돌았다.
하지만 나의 일생은 고달픈 때도 있었고 슬픈 때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더 즐거웠고 더 행복했고 더 보람된 나날들이었음을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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