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 속을 거닐다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나같이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줄기 신나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그리 반가울 수 없었다.
마치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원래 이 놈은 비와 바람과 나무를 좋아했다.
때문에 한밤중에도 불을 켜놓고 자주 정원을 감상했다.
솔직히 말해 정원이래야 단 2평도 채 안되었다.
하지만 거기엔 흑장미도 있었고 백장미도 있었다.
뿐만아니라 능소화 호접란 봉선화 국화는 물론이고 유자나무 밀감나무 사과나무
복숭아나무 감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도 있었다.
사과나 복숭아나 감나무. 앵두는 모두 지난 여름 과육을 먹고 난 뒤 씨를 모아두었다가
짬짬이 심은건데 희안하게도 잘자라 이제는 가지치기할 정도로 제법 키가 컸다.
나무를 기르는 목적은 단 하나였다.
장난삼아 관상용 분재를 만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사 모든 게 다 그렇듯이 이 세상엔 영원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때로는 친구도 가고 아내도 가고 남편도 갔다.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이를 낳았다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나 역시 얼마나 더 살다가 갈지는 모르겠지만 사는 날 까지 늘 행복하게 그렇게 살다 살다
가고 싶은게 소원이라면 소원이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하나님하고 약속한 게 있어서 그런지 아직까지
병원신세 져본 일도 없고 어디 특별히 아픈데도 없으니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이었다.
왕년엔 돈도 좀 만져볼만큼 만져봐서 그런지 돈도 그리 중요한건 아니었다.
너무 없으면 좀 불편했지만 분에 넘칠 정도로 많으니까 사람이 또 조금 이상했다.
해서 바울이 있는 것을 족할줄로 생각하라고 했나보다.
사실 살아보면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게
돈을 많이 벌든지 적게 벌든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하는 게 제일 재미있었다.
일이 없으면 인생은 참 무료했다.
그 다음이 사랑하는 일이었다.
사랑의 대상은 각자 다 다를 수 있겠지만
아무튼 사랑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도 별로 없었다.
사랑 이외에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면 그건 여행이었다.
누구는 여럿이 같이 어울려 다닐 때 제일 신바람 난다했지만 나 같은 경우는 카메라 한 대 만 달랑 울러매고
내마음 내키는대로 떠돌아 다니는 그게 제일 행복했다.
한데 실컷 놀며 즐기다보면 또 하나의 즐거움이 있었다.
정신적이든지 물질적이든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때 였다.
어젠 모처럼 농협에 간 김에 우리집 근처 두배로 마트에 들렸더니
아는 여인이 반색을 하며 사람을 반겼다.
-우짠일로 이 시간에
-먹고 살려고 쌀 사러왔다 아니오.
-쌀?
-많이 싸봐야 못먹으니 10kg만 배달 좀 해달라고 왔지.
-내가 뭐 하나 사줄까요?
-사주기는 뭘 사줘. 내가 여자에게 사줘야지.
-아이다. 내가 사줄게요.
-괜찮다해도
-가만있으오 마......하더니
여인이 삼겸살 한 박스를 덜렁 가슴에 안겨주었다.
-아이고 이게 몬 횡재고.
이럴 때 긴 말 짧은 말하면 촌 넘 표시 내는것 밖에 안되어서
아무튼 고맙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생전에 본체만체하던 두배로 마트 주인 아주머니가
예쁜 여자가 이 놈을 엄청 좋아한다고 느꼈는지
내 언제 본체만체 했습니꺼...... 하듯이 생글생글 웃었다.
역시 남자는 자고로 여자에게 인기가 있어야 되는갑다.
한데 한밤중에 술이 고파 가시오가피주를 한 병 사러 다시 마트에 들렸더니
-아까 그 여자 누굽니까?하고 또 꼬치꼬치 캐물었다.
-요 앞에 내 단골집 주인인데 왜요?
-그럼 언제 우리 같이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술? 좋지.
나중에 자초지종을 듣고보니 저거집 엄청 단골손님이란다.
그러면 그렇지-난 또 내한테 흑심이 있는줄 알았지.
아무튼 간밤에도 비가 억수로 쏟아지더니 오늘 낮엔 아예 물동이로 내려붓듯이 한 시간 이상 쏟아부었다.
아 이 빗줄기 ......너무 좋다.
행복이 뭐 따로 있나. 이런게 행복이지.
그나저나 전화한다는 그 여자는 와 전화도 안하노?
은근히 기다려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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