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진은 강화도 학사재 뒷모습을 누가 찍은 것이다. 우리건축의 아름다움을
너무 잘 표현한 것같아 올려보았다.
집 짓는 이야기 5
입금님의 밥상
임금님의 밥상을 예로부터 수라상이라고 했다.
궁중예법에 밝은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임금님은 하루에 서너차례 식사를 한 것 같았다.
새벽엔 초조반(初朝飯)이라하여 주로 죽 위주로 위를 따뜻하게 한 것 같고 아침 저녁은 수라상이라고 하여 오전 10시와 저녁 6시경에 밥을 먹었다고 하였다.
점심식사는 낮것이라고 하여 주로 과일 /과자/화채/떡과같은 다과반과 미음을 먹었는데 왕과 왕비는
식사는 같이하되 상은 각각 따로 차린 모양이었다.
밥은 주로 흰밥과 팥밥 두가지를 내어 놓았으며 기본음식외에 반찬은 12가지정도였다고 하였다.
기본음식은 밥 /국/찌게/찜/전골/김치/장등이었는데 국은 흰밥일땐 미역국을 내어놓았으며 팥밥일땐 곰탕을 내어 놓았다고 하였다.
임금님의 밥상은 부산교육대학 앞에 있는 분식점 이름이었다.
이 이름은 내가 지어준 것인데 사람들은 종종 임금님의 밥상은 수라상이라고해야 맞는데 왜 밥상이라고 했느냐고 물었다.
거기에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대학가는 원래 많이주고 싸야 인기가 있었는데 라면 한 그릇을 먹으면서 수라상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거창하고 그렇다고 다른 이름을 붙이기도 뭣해 지금은 비록 라면 한그릇으로 점심을 떼우지만 마음만은 임금님 못지않다해서 그렇게 붙인 이름이었다.
그런데 막상 인테리어를 마치고 오픈을 하고나니 발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처음엔 젊은 부부내외가 길거리에서 포장마차 하는 것보다야 안났겠나 하고 시작한건데 지금은 종업원 4명을 더 데리고도 바빠서 쩔쩔매였다.
원래 이집은 윤 덕숙 시인의 집이엇다.
윤 詩人은 여자였지만 남자보다 더 한량끼가 많은 아티스트였다.
그녀는 노래도 좋아하고 창도 좋아하고 어울려 노는 것도 무척 좋아했다.
키가 커서그런지 왠만한 남잔 그 앞에 서기만해도 작아보였는데 하지만 마음만은 상당히 순박하면서도 담백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건 한길에서였다.
한길은 동광초등학교 바로 앞에 있었는데 주인이 송재 이상개시인의 부인인 목 경희여사였다.
목여사는 진해 사람이었다.
그 곳엔 부산에서는 내노라하는 시인묵객들이 해질무렵이면 하나둘씩 모여 시도 읊고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시는 그런 집이었다.
해서 서울에 귀천이 있다면 부산엔 한길이 있다고 자주 떠들었는데 암튼 분위기만은 60년대에서 한발짝도 더 나가지 않았다.
이곳엔 영화감독인 유현목/김사겸 감독을 위시해서 율관 선생과 송제 이 상개 /박응석/ 임 명수/ 정 봉길/ 오 정민/ 박근기/박 창호/백성도 교수등 시인/화가 /서예가/음악가 /저널리스드들이 마치 제 집 드나들듯이 드나들며 정을 나누는 곳이었는데 내가 갔을때만 해도 러시아 미인인 나타샤가 애인과 함께 기타를 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집이 허름하다보니 화장실 또한 옛모습 그대로였다.
술이 좀 거나해서 화장실을 가려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와야했는데 좁은 골목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면 암모니아 냄새가 등천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미인이라도 이 곳에 온 이상 볼일을 볼려면 별일없이 엉덩이를 까고 볼일을 봐야했다.
윤 덕숙 시인이 점심을 같이하자고 한건 셋집 인테리어때문이었다.
윤시인은 집이 해운대 신시가지에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돈을 잘 버는지 부산교육대학교 앞에 집이 또 한채 있었다.
때문에 1층엔 찻집겸 들풀 문학관(예전이름은 惠苑이었다)으로 만들고 2층은 한동안 비어두었는데 누구에겐가 세를 준 모양이었다.
몇해전에도 전통찻집을 하겠다고 해서 1층을 꾸며주었는데 2층이 나가자 이 넘을 또 부른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게 좀 그랬다.
윤 시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선생님이 좀 도와주어야겠습니다고 뜬금없이 사정을 하였다.
-내가 뭘 도와주지?
-새로 들어온 사람이 돈이 없습니다.
원래 길거리에서 포장마차를 하다가 이걸 얻었는데 전세를 얻고나니 돈이없답니다
이걸 우야믄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수중에 얼마나 가지고 있는데 ?
-다 합쳐야 1,000만원 뿐이랍니다.
-1,000만원? 그걸 가지고 우예하노
-그러게 말입니더 . 선생님이 좀 도와주이소
세를 들었다는 여자는 키가 작고 약간 똥똥했다.
첫눈에 보아도 촌 여자라는게 역력했는데 길거리에서 막장사를 하느라 가꿀 엄두도 나지않았는지 내가봐도 시커머티티했다.
당시 인테리어 비용이 평당 100만원에서 120만원했는데 평수가 33평이기때문에 반으로 뚝 잘라 해준다해도 최소한 16,500,000만원 정도는있어야했다.
여자는 공사만 맡아준다면 그 은혜는 잊지않겠다고 거듭 머리를 숙였지만 공사비가 따라가지 못하다보니 참으로 난감했다.
원래 공사비의 절반은 자재비가 차지하고 절반은 인건비가 차지하게 마련인데 날강도처럼 도둑질을 하지 않는 이상 이윤은 총공사비의 10%-20%를 크게 넘지 않았다.
때문에 주어진 1,000,만원을 가지고 홀도 꾸미고 주방도 만들고 출입구도 만들고 심지어 간판까지 달아 주어야 하니 내 혼자서 하는 일이라면 그냥 공짜라도 해줄수 있지만 난들 별 도리가 없었다.
해서 머리가 아파 이걸 우야노하다가 공사를 맡기전에 두가지만 함 물어보자했더니 여자가 무척 긴장을 했다.
내가 여직 만들어준 집 중에는 하나도 망한 집이 없는데 도대체 뭘 잘하느냐고 물었더니 찌게하고 우동만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다고 하였다.
그럼 일단 그건 통과됐고 두번째 이 공사를 하려면 돈이 모자라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땜질하듯이 해야하는데 그러려면 무척 시간이 걸릴텐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하고 물었더니 이 여인 대답이 걸작이었다.선생님이 해 주겠다고 약속만 하면 자긴 6개월이 걸리더라도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와 이것봐라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더니 진짜인가베 ..........)
그렇다면 누가 죽던지 함 해보자하고 한게 임금님 밥상이었다.
물론 지금도 교대 앞에서 부부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집 찌게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언젠가 한번 들려 일부러 밥을 먹었더니 부부가 한사코 밥값을 안 받으러했다.
해서 두번 다시 그러면 안온다 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밥값을 받았는데 개업한 첫날 수입이 60만원이 훨넘었다고 귀뜸을 했다.
(아자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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