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1

옥탑방 유감

커피앤레인 2006. 3. 4.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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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유난히도 산이 많다.

비행기를 타고 아래를 내다보면 부산 /대구/ 대전 /서울만 집들이 오골오골 모여있지 대부분의 땅은 산이 전국토를 거의 다 점유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 도심은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거리는 비좁고 건축환경 또한 열악하기 그지없다,

 

특히 피난민들의 마지막 보루였던 부산은 더더구나 건축환경이 열악하다.

6.25 동란이 일어나자 당시만해도 사람들은 남으로 남으로 피난길에 나섰는데.

이불보따리와 간단한 취사도구만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인체 부산에 도착한 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산으로 산으로만 올라갔다.

 

왜냐하면 이미 평지는 딴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있거나 땅 주인이 시퍼렇게 살아있었기 때문에  일가친척 하나없는 사람들은 산 기슭에 그나마 마음놓고  움막을 짓거나 판자촌을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살았던 동네도 판자촌이나 별반 다를바가 없었는데 당시만 해도그가 살았던 산동네엔 온통 보리밭 천지였다. 

 

피난민들은 하루하루 풀칠하기도 힘겨운 나머지 아쉬운대로 거처를 마련한 다음날부터 아침이면 시내에 나가 좌판을 깔고 고기장사를 하거나 일명 깡통시장이란데서 구제품을 사고 팔았다.

물론 건장한 남자들은 부두노동자로 나가 날품을 팔아 돈을 벌었다.

 

그 시절에 유행했던 노래중에 무역선 넘나드는 부산항 제1부두는.........당시의 서민들의 애환을 그린노래로 부산하면 의례껏 떠오르는 유행가였다.

 

그들은  저녁이면 국수나 밀가루를 한봉지씩 사들고왔는데 그걸로 온 식구가 허기진 배를 채우고는 종종 마을사람들과 어울려 막걸리로 시름을 달래기도 하였다.

때문에 부산은 지정학적으로 일본사람들이 살았던 왜관하고 6.25 사변하고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명적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는 도시였다.

 

그가 어렸을 적에 살았던 산 동네 바로 아래 평지 바른 곳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의 관저가 있었다.

기와로 지은 집인데 누가봐도 아름다운 집이었다.

물론 지금은 임시 수도 기념관으로 변했지만 당시는 이 대통령이 거기에 기거하며 국사를 보았던 곳으로 그 동네에서는 제일 큰 집이었다. 

 

대통령 관저 바로 앞에는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철기 이범석장군의 집이었는데 지금은 어느 절의 말사인지 사월 초파일이면 어김없이 연등을 내다 걸았다.

 

부산을 한번이라도 찾은 사람은 부산의 집들 가운데 상당수가 산꼭대기까지 빡빡하게 들어선 것을 보고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6.25가 남긴 상채기가 산비탈엔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간혹 큰 집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이 10평에서 20평 내외가 언필칭 달동네의 실정이다.

 

문제는 아이들이 문제였다.

어느새 부쩍 커버린 아이들을 보면서 부부는 새로운 집을 짓거나 방을 넓혀야 하는데 주어진 대지평수가 너무 적다보니 자연 방 둘 거실겸 부엌 하나 화장실을 쪼개고 나니 더 이상 남은 공간이 없었다.

실력이 좋아 딸을 둘 낳던지 아들을  둘 낳은 사람은 괜찮지만 장성한 자식들이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사람들은 그야말로 머리가 복잡해진다.

 

다 큰 자식을 엄마 아빠 방에 같이 재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매를 한 방에 둘 수도 없는 처지이다보니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다.

 

집을 한번이라도 지어본 사람들은 느끼겠지만 때론 건축법이란게 너무 현실적으로 동떨어져있거나  획일적이라 말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때론 이건 아니다하고 문제를 가지고 관할구청을 찾아가면  담당자는 자긴들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볼멘 소리를 하며 오히려 도와달라고 하니 이 또한 딱한 노릇이다.

 

예전에는 단독주택을 지으면 옥상에 가재도구를 넣을 수 있도록 서너평 정도 다락방을 허용한 때가 있었다.

 

그러다 그것이 차츰 주거공간으로 바뀌자 다락방 높이를 180cm에서 150cm 그다음은 120cm등으로 제한하다가 나중에는 그것도 저것도 다 없애버렸는데 실제로 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고 답답할 노릇이다.

그게 더 있다고 하늘을 가리는 것도 아니고 남의 집을 넘어가는 것도 아닌데도 건축법은 요지부동이다.

 

식구는 넷인데 그럼 다 큰 딸이나 아들은 어디에 재워야한다 말인가.....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옛말에 양반이 배 부르면 상놈 배 고픈줄 모른다고 했는데 꼭 그 짝이다.

 

그러다보니 자연 불법건물이 생기고 옥탑방도 등장하는게 아니겠는가.

 

그도 이런 과정을 여러번 겪으면서 관할구청을 상대로 설득도 해보고 싸우기도 하였지만 언제나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 별 소득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여러번 망치부대들에게 부대끼면서도 서민들이 살 수있는 공간을 억지로라도 확보한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법치국가에 살면서 법을 어긴게 잘한게 아니라 법을 어기게 하는 제도도 결코 잘한 짓은 아닌것 같다.

법도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닌가.

 

뒤늦게나마 옥탑방을 일정기간 양성화한다니까 천만다행이지만 선심성 행정보다는 차체에 건축법이 보다 융통성있게 자율적으로 바뀌어 서민이 제 푼수에 맞게 살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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