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쓰는 일기

아침에 쓰는 일기 92/고향을 가진 자는 다행하다

커피앤레인 2006. 7. 5.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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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가진자는 다행하다

 

 

 

비가 내려서그런지 

오늘따라  택사스 골목길은 그 많던 러시아 여인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까지 길거리에서 아자씨 맥주한잔 하고 가세요 하고

손짓하던 배불떼기 나타샤도 어디에서 자고 있는지

오늘은 카페문을 굳게 걸어잠갔다.

나타샤는 그래도 인정이 많았다.

종종 포옹은 허락했지만 키쓰는 노였다.

 

 

택사스 골목을 지나면

이내 상해거리가 나왔다.

중국사람들이 벌써부터 가게 문을 열었나보다.

불을 환하게 켜 놓고 청소를 하고 있는게 눈에 띄었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그새 어디로 다 나갔나보다.

문을 활짝 열고 선풍기를 있는대로 틀고는

컴퓨터부터 켰다.

비가 온 탓에  별로 덮지도 않는데도

워낙 바람을 좋아해서 그런지

선풍기를 습관처럼 틀었다.

바람소리가 들리면 그나마 생동감 같은게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간밤엔 너무늦어 장미를 사지 못했다.

대신  부산포 앞에서 미대교수인 백교수를 만났다.

같은 대학 교수들과 술을 한잔 하고 나오는지

이미 전주가 꽤 있어 보였다.

하긴 나도 생탁을 한 병 다 마시고

거리를 배회하는 중이었으니까

비오는날 술 친구로서는 안성마춤이었다.

한동안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해서 그런지

백교수는 한 손을 꼬옥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백교수 집과 우리집은 그리 멀지않았다.

-강나루 갑시다.

-그럽시다.

 

강나루에 들어서니  김감독님이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 이게 누구야

하고 감독님은 반색을 하고 자리를 권했다.

영화 감독이며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김감독님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꽤나

이름이 알려진 원로 감독이었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뚝거렸지만 술기운은 여전했다. 

한동안 얼굴을 서로 보지 못해서 그런지  

반가움이 찰찰 했다.

 

 

 

올만에 부산바닥에선

그래도 내노라하는  낭만파들만 다 모였으니

-제수씨 여기 안주하고 술 좀 더주소.하더니

이내 예술이 어떻고 그림이 어떻고 영화가 어떻고

하다가 결국은 가고파가 나오고 유치환의 사랑했으므로 행복했노라는

싯귀까지 등장했다.

술을 마셔보면 제각끔 특징이 있었다.

김감독님은 언제나 가고파 아니면 박꽃을 즐겨불렀다.

반면에 백교수는 청마 유치환시인의 시를 잘도 외웠다.

그중에서도 깃발을 무척 좋아했다.

제법 시간이 많이 갔나보다.

술이 거나했는지  또 다시 제집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마치 니이체의 고독을 읊듯이.

이윽고 눈이 오리라

까마귀 우짖으며 거리로 흝으러진다

고향은 가진자는 그래도 다행하다